23: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와 마르다와 예수님 (누가복음 10:25 – 42)

그들은 율법을 알고 있었지만, 그 율법 속에 담긴 하나님의 의도를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주를 위한 사역보다 주님과의 교제가 더 중요합니다. 

👉 누가복음 10:25 - 42을 읽으십시오


Q1. 율법교사는 왜 “누가 내 이웃이니이까?”라고 물었습니까? (29절)

ANS: 그는 자신이 행하고 있는 일을 정당화하려 하였기 때문입니다. 즉, 사마리아 사람들을 멸시하면서도 자신은 계명을 지키고 있다고 주장하려 했습니다.

“누가 내 이웃인가?”라는 논쟁은 성경 교사들이 율법 안에서 의무의 범위를 정의하려고 하면서 생겨났습니다. 특히 레위기 19:18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 계명은 “네 이웃을 사랑하라”고 말하며 “네 백성”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이러한 질문이 생겨났습니다. 특히, 레위기 19:34에서 처럼 이방인을 사랑하라는 계명으로 인해서 '이웃'을 향한 사랑과 '이방인'을 향한 사랑을 구별하는 등, 그들가운데서는 누가 그 계명 안에 포함되고, 누가 포함되지 않는가, 계명이 요구하는 범위가 어디까지이며 어느지점부터는 그 계명으로부터 자유함을 받는지, 자신이 누구에게 책임이 있으며, 그 책임이 어디까지인지를 알고자 하였습니다.

문자적으로 주어진 계명은 우리의 삶의 모든 다양한 상황들에 대해서 명시적으로 규정할 수 없다는 한계선을 이용하여 우리는 그 계명의 정신을 알려하지 않고 단지 계명의 한계의 선을 그음으로써 계명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죄의 본성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이 경계 설정으로 축소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시고, 그것을 스스로 제한하지 않는 적극적인 자비로 전환시키십니다.



Q2. 제사장과 레위인은 그 사람을 보고 무엇을 하였습니까?

ANS: 그들은 반대편으로 지나갔습니다.

그들은 그 사건에 관여하고 싶어 하지 않았습니다. 이기적인 마음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종교적인 일꾼으로 설정하셨다는 점에 주목하십시오. 아마도 그들은 시체로 인해 자신이 더러워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것 자체는 옳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역의 목적은 단순히 종교적 의식을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영혼을 돌보아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와 영광을 보게 하는 데 있습니다.



Q3. 사마리아 사람이 자비를 베푸는 세 가지 장면을 찾으십시오.

ANS: 그를 불쌍히 여겼고(33절), 자기 짐승에 태웠으며(34절, 사마리아인은 걸어가며 온 마음으로 그를 돌보았습니다), 추가 비용을 지불하여 계속 치료를 받게 하였습니다(35절).


Q4. “누가 내 이웃이니이까?”라는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답은 무엇입니까?

ANS: “필요한 자에게 이웃이 되어 주라”입니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들에 대한 미움을 정당화하려고 이 질문을 하였으며, 하나님께서 사랑의 계명을 주신 의도를 무시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원수까지도 사랑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종종 ‘이웃’이라는 용어를 정의하고, 우리의 의무가 어디까지인지를 명확히 하려고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자신이 잘하고 있다고 정당화하려 하며, 그 범위에 포함되지 않는 영역에 대해서는 의무에서 벗어나려 합니다. 자신의 의를 세우기 위함이든, 자신의 욕망을 추구하기 위함이든, 둘 다 악한 것입니다.

누가 이웃인지를 우리가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하나님께서 결정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 주위에 두신, 모든 사람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함으로, “이웃”이 되어야 합니다.

사랑은 상대의 자격에 따라 대하는 것이 아니라, 자비를 베푸는 것입니다.



Q5. 우리는 사역을 위해 바쁘게 살아갑니다. 더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38-42절)

ANS: 주님과의 인격적인 관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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