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부자 관원 & 제자들 & 맹인 (누가복음 18:18–43)

이 본문에 나오는 모든 사람은 에수님과 만났으며 구원과 관련한 말씀을 들었습니다. 부자 관원은 영생을 얻는 방법을 듣고 근심하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은 주님께서 십자가 구원의 비밀을 설명해주셨지만 그 의미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맹인은 믿음으로 예수님께 나아가 눈을 뜨는 구원을 경험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 누가복음 18:18-43을 읽으십시오.


Q1. 부자 관원은 자신의 행위로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선한 선생님이여, 제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물었습니다. 그의 생각을 아신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영생을 보상으로 받을 만큼 (        )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영생은 얻는 것이 아닌 오직 (      )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경건했고 (     )을 지켰지만, 구원에 대한 확신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침내 그가 해야 할 일을 말씀하셨습니다. “네게 있는 (     )을 팔아 (      )에게 나누어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      ).”

부자 관원은 자신의 행위로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선한 선생님이여, 제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물었습니다. 그의 생각을 아신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영생을 보상으로 받을 만큼 (  선 )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영생은 얻는 것이 아닌 오직 ( 하나님 )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경건했고 ( 율법  )을 지켰지만, 구원에 대한 확신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침내 그가 해야 할 일을 말씀하셨습니다. “네게 있는 ( 모든것 )을 팔아 ( 가난한자들  )에게 나누어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  나를 따르라    ).”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라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죄가 있거나 의롭지 않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 젊은이가 선한 행위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잘못된 이해를 바로잡으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율법을 지키는 것이 영생을 얻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언급하셨을까요? 구약의 율법은 영생을 얻기 위한 방법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인간의 죄를 드러내고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리게 하기 위해 주어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는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었을까요? 물론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율법을 주신 그 분이 영생을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구약에는 영생에 대한 소망이 (율법서가 아닌 선지서에)있었지만, 그 소망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약속으로 완전히 드러나기 전까지 온전히 계시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율법을 지켰음에도 불구하고 영생에 대한 확신이 없었고, 그것을 묻기 위해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이 사람은 율법 전체를 지켰지만, 율법의 정신과 목적이었던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는 부족했을 수 있습니다. 그는 율법의 문자적인 규정은 지켰지만, 율법의 정신인 ‘사랑’은 이루지 못했습니다.

“나를 따르라.”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생명의 길을 열고 계십니다. 선지자들이 여러 모형과 그림자를 통해 예고했던 하나님의 구원이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났습니다. 이 젊은 사람처럼 율법 아래 있던 사람들이 간절히 기다렸던 하나님의 구원이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선포되었습니다.

22절은 18절의 질문에 대한 답입니다. 마태복음 19:21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라는 말씀을 함께 보면, 예수님의 의미를 이렇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네가 너의 구원을 확실히 하고 싶다면, 내가 어디로 인도하던지 나를 따르라.”



Q2. 영생을 얻는 방법을 들었는데도 왜 그는 근심하게 되었습니까?

그는 매우 부자였습니다. 그에게는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려웠습니다.

돈뿐만 아니라 지식, 건강, 가족, 자신의 능력과 같이 우리가 의지하는 어떤 것이든 예수님을 신뢰하고 따르는 것을 어렵게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보다 이런 것들을 더 추구하면 하나님의 구원을 받아들임에 있어서 장애물이 됩니다.



Q3.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주어진 약속은 무엇입니까? (29-30절)

(1) 이 세상에서 많은 유익을 받고 (여러 배를 받으며), (2) 오는 세상에서 영생을 받게 됩니다.

28절은 제자의 태도를 보여 줍니다. 만약 여러분이 세상에 대한 남아 있는 욕망을 내려놓지 않고, 예수님을 온전히 따르지도 않고 그렇다고 완전히 떠나지도 않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한 사람이 구원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흥미롭게도 성경은 예수님을 부인하는 것과 예수님을 따르는 것 사이의 이러한 중간 상태에 대해서는 많이 말하지 않습니다. 참으로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에게는 확실한 약속이 주어집니다. 그러나 중간에 머무르는 사람들은 자신의 영원한 운명에 대해 불확실함 속에 살아갑니다. 마지막 날에 그들은 좋은 의미에서든 나쁜 의미에서든 놀라게 될 것입니다.



Q4.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따로 데리고 가셔서 세 번째로 자신의 고난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왜 제자들은 그것을 이해하지 못했습니까?

이 말씀이 그들에게 감추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메시아에 대한 선지서의 예언은 이러했습니다. 그분은 택한성 예루살렘에서 자기 백성에게 버림받고 이방인들에게 넘겨질 것이며, 잔혹한 죽음을 당하시고 부활하실 것입니다. 하나하나가 매우 충격적인 사건이기에 이들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더욱이 후에 한 제자는 예수님을 배반했고, 또 다른 제자는 예수님을 부인했으며, 모든 제자들은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쳤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우리의 구주를 대했던 모습입니다.



Q5. 맹인의 어떤 행동을 믿음의 행동으로 볼 수 있습니까?

“앞서 가던 사람들이 그를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였더라.”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그는 예수님만이 자신의 상황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의 꾸짖음에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그는 돈이나 다른 것을 구하지 않았고, 단지 눈을 뜨게 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눈을 고치실 수 있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예수님께서는 맹인의 믿음을 칭찬하셨습니다. 그의 믿음이 그로 하여금 ‘주도적으로’ 행동으로 나아가게 했다는 점에 주목하십시오. 그는 예수님께 부르짖었고, 사람들이 잠잠하라고 했을 때 더욱 크게 부르짖었으며, 담대하게 눈을 뜨게 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치유와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예수의 이름을 사용할 수 있는 특권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분의 이름으로 우리는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 하나님의 긍휼과 축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히브리서 4:16).

이것은 구약 시대와 대조됩니다. 구약에서는 백성들이 하나님께 나아갈때 일반적으로 하나님께서 주도권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이 믿음으로 하나님께 언제든지 나아올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22. 아히도벨의 죽음 ( 사무엘하 17:1 – 29)

21. 시바, 시므이, 아히도벨 (사무엘하 16:1–23)

20. 다시 도망자가 되다: 징계의 자리 (사무엘하 15:13–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