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 이 거룩하신 하나님 여호와 앞에 누가 능히 서리요? ( 사무엘상 6:1 – 7:1)
여호와의 궤가 이스라엘로 돌아왔지만, 벧세메스 사람들은 궤를 함부로 다루었고, 여호와께서 그들을 치셨습니다. 이스라엘사람들도 블레셋 사람들도 거룩하신 하나님 여호와앞에는 능히 설 수 없었습니다.
Q1. 제사장들과 복술자들은 여호와의 궤를 이스라엘로 돌려보냄에 있어서 어떤 조언을 했습니까? (3-4절)
“거저 보내지 말고 그에게 속건제를 드리라.”
그들은 여호와의 궤를 단순한 전리품처럼 다룬 것 때문에 하나님을 범죄케 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이에 대한 속죄로 그들은 하나님께 속건제를 드리고자 합니다. 블레셋 사람들의 궤에 대한 경외심은 여호와를 향한 이스라엘의 함부로 대하는 태도와는 극명히 대조됩니다.
Q2. 그들이 드린 속건제는 무엇이었습니까?
금독종 다섯과 금쥐 다섯.
이 금 형상을 궤와 함께 보낸 행위는 다음을 의미합니다. 첫째,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셨다는 사실을 인정한 것입니다. 둘째, 그들은 이러한 제물을 보내면서 자신들과 그들의 성읍에 임한 하나님의 손길이 거두어지기를 바랐습니다. 셋째, 금 자체가 예물입니다.
Q3. “너희는 이스라엘 신께 ( ) 을 돌리라. 그가 ( ) 그의 손을 너희에게서 가볌게 하실까 하노라. 애굽인과 ( )가 그들의 ( )을 완악하게 한것 같이 하지 말라”
“너희는 이스라엘 신께 ( 영광 ) 을 돌리라. 그가 ( 혹 ) 그의 손을 너희에게서 가볌게 하실까 하노라. 애굽인과 ( 바로 )가 그들의 ( 마음 )을 완악하게 한것 같이 하지 말라”
블레셋 사람들의 이 말은 궤를 함부로 전쟁터로 가져옴으로 여호와의 주권을 존중하지 않은 이스라엘에 대한 질책이 되기도 합니다.
블레셋 사람들과 이스라엘 백성의 태도를 비교해 봅시다. 블레셋 사람들은 “혹” (삼상 6:5)라고 말했지만,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언약궤를 ... 우리중에 있게 하여 그것으로 우리를 구원하게 하자”(삼상 4:3)라고 말했습니다. 이스라엘사람들은 여호와의 언약궤가 전장에 있으면 여호와의 이름을 위해서라고 이스라엘을 승리하게 하실 수 밖에 없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마치 성경적 이름으로 가게 이름을 지으면 장사가 잘 될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말이죠. 하나님을 조종하려고 한 것입니다. 반면, 블레셋 사람들은 여호와의 주권을 인정하며 결과를 그분께 맡겼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궤를 속건제와 함께 돌려보낸다 해도, 재앙이 여전히 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겸손히 용서를 구할 뿐이다” 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것이 여호와를 존중하는 방식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다니엘 3:18).
“너희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말라.”
백성들의 지속적인 죄의 반복으로 가득찬 사사기 이후에 이어지는 성경인 사무엘서에서는 그러한 반복적인 죄의 근본 문제를 드러냅니다. 백성의 마음이 완악함으로 여호와께 온전히 헌신하지 않고 자신의 마음속 우상을 추구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마음의 문제를 지적하는 것은 성경적 맥락에 있어서 중요한 전환점으로, 성경은 이제 마음의 문제를 다루기 시작합니다. 사무엘상은 여호와께서 그분의 마음에 합한 자를 찾으신다는 것을 강조합니다(삼상 2:35, 16:1, 7).
여호와께서는 블레셋 사람들의 입을 통해 이스라엘과 성경 독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여호수아가 두려워할 때, 여호와께서는 라합의 말을 통해 확신시키셨습니다. 기드온에게는 미디안 사람들의 꿈을 통해 승리를 확인시켜 주셨습니다. 발람이라는 이방 선지자는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언약적 보호하심을 선포했습니다. 다윗에게는 아비가일의 지혜로운 말을 통해 그를 보호하시겠다는 확신을 주셨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예기치 못한 사람들을 통해 그분의 백성에게 말씀하시고 인도하실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Q4. 그들이 재앙이 이스라엘의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어떻게 분별했습니까? (7-9절)
멍에를 맨 적 없는 암소 두 마리가 송아지와 떨어져 이스라엘 땅으로 곧바로 간다면, 이는 재앙이 이스라엘의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울고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12절)
암소들은 송아지에게 돌아가고 싶은 본능에도 불구하고 궤를 운반하는 방향으로 알수 없는 힘에 의해 강제로 가야했음을 보여줍니다.
Q5. 궤가 처음 ( )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기뻐했습니다. 레위 사람들이 궤를 ( ) 위에 두고 암소들을 ( )로 드렸습니다. ( )의 다섯 방백들은 자신들의 ( )가 그 번제와 함께 드려지는 것을 보고 에그론으로 돌아갔습니다.
궤가 처음 ( 벧세메스 )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기뻐했습니다. 레위 사람들이 궤를 ( 큰돌 ) 위에 두고 암소들을 ( 번제 )로 드렸습니다. ( 블레셋 )의 다섯 방백들은 자신들의 ( 속건제 )가 그 번제와 함께 드려지는 것을 보고 에그론으로 돌아갔습니다.
성경은 블레셋 사람들이 여호와께 제사 드리는 데 참여했음을 암시합니다. 그들은 수레를 장작으로, 암소를 제물로, 속건제를 제공했습니다. 다섯 방백들이 그자리에 있었음과 그들의 다섯 성읍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경은 블레셋 민족이 여호와께 제사를 드렸음을 암시합니다. 이스라엘은 제사장으로서 주재했구요. 이 장면은 모든 나라가 시온으로 나아와 여호와께 경배하는 종말론적 성취를 보여줍니다.
Q6. 여호와께서 벧세메스 사람들을 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들이 여호와의 궤를 들여다보았기 때문입니다.
“이 거룩한 하나님 여호와 앞에 누가 능히 서리요?”
‘벧세메스’라는 이름은 태양의 집을 의미하며, 이곳이 태양신을 숭배하던 장소였음을 암시합니다. 아마도 벧세메스 사람들은 여호와의 궤를 다른 신들의 신상을 취급하는 방식으로 취급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늘 강조하듯이, 여호와 같으신 이는 없습니다. 여호와는 거룩하시고 유일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들은 “이 신은 다른 신들과 너무도 다르다. 우리는 감당할 수 없다. 이 궤를 치워 달라”고 말한 것입니다.
반면 아비나답의 집에서는 엘르아살을 성별하여 궤를 지키게 했습니다. 이는 여호와를 섬기는 올바른 방법이었습니다.
언약궤의 유배 이야기는 우리에게 격려와 경고를 동시에 줍니다. 이스라엘이 자신들의 잘못으로 인해 궤를 잃었음에도, 여호와께서는 궤가 이스라엘로 돌아오도록 섭리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의 패배로 인해 여호와의 이름이 모욕을 당했으나, 결국 여호와께서는 스스로 영광을 취하셨습니다.
또한. 여호와께서는 자신의 이름이 모욕당하는 상황에서도, 자신의 백성을 교훈하시기 위해 기꺼이 그들의 패배와 하나님 이름의 수치당하심을 허락하십니다.
우리는 주권자이신 여호와를 결코 강압하거나 조종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여호와는 알라딘의 램프의 요정처럼 조종당할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는 여호와께 나아갈 때 스스로 구별하고 성별할 수 있도록 해야합니다. 그와 같은 분은 없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