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안식일 논쟁: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요 5:1 – 23)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사 누워있던 자리를 들고 가게 하신 것에 대해 종교지도자들은 안식일을 범하게 했다고 비난합니다. 그런데 그러한 비난에 대해서 예수님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왜 그렇게 말씀하셨을까요?

👉 요한복음 5:1 - 23


Q1. 이 사람은 (       )년의 세월동안 병으로 고생하며 (        ) 라는 연못의 물이 동할때 다른 사람이 낫는 것을 지켜볼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그에게 “(         )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실때 치유함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날은 (         )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 38 )년의 세월동안 병으로 고생하며 ( 베데스다 ) 라는 연못의 물이 동할때 다른 사람이 낫는 것을 지켜볼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그에게 “( 일어나 )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실때 치유함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날은 ( 안식일 )이었습니다.

베데스다: 벧-헤세드 “자비의 집”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 자비는 오직 첫번째 사람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나머지는 씁쓸한 후회속에 ‘다음번에는 내가 다른 사람보다 먼저 들어가야지’ 하는 다짐만 되뇌일 뿐이었습니다. 소위 ‘자비의 집’으로 불리는 곳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비를 경험하지 못한 것입니다.

이제는 무한한 자비의 근원이신 그 분이 오셨습니다. 예수님께 오는 사람은 누구든지 그의 충만함으로부터 한량없는 은혜를 받게 됩니다 (1:16)


Q2. 예수님이 '네가 낫고자 하느냐’ 고 물었을 때, 그는 '네, 원합니다'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7절처럼 말했습니다. 그가 예수님께 대한 기대는 무엇이었습니까? 

그는 예수님이 자신을 물 속에 넣어주길 원했을 것입니다.

아니면 낫고 싶지만 나을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절망일 수 있습니다. 수년간 반복된 실망은 이제 그로 하여금 어떻게 하면 먼저 물에 들어갈지에 대해 몰두하게 만들었습니다. 낫고자 하는 것이 궁극적인 목적인데 그것을 잊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행복한 삶을 원합니다. 그를 위해 돈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돈을 열심히 법니다. 궁극적인 삶의 목적, 행복한 삶을 잊어버리고 돈의 노예가 되어 돈이 생겨도 행복하지 않게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돈이 없이도 우리를 행복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이 물에 들어가지 않고도 치유받은 것처럼 말이죠.

우리가 아무리 절망적이라도 예수님은 우리의 희망의 이유이자 은혜의 샘입니다.

‘일어나라'고 선포하시자 그의 근육과 관절이 힘을 얻게 되었고 그는 '곧' 나았습니다 (9절)


Q3. 안식일을 어겼다는 그들의 비난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내 아버지께서 지금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그들은 그 사람이 자신이 누웠던 자리를 들고 이동하는 것을 노동이라고 생각했고, 안식일 계명을 어기었다고 말한 것입니다.

안식일을 지킴으로써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는 기대과 소망을 고백하는 것이 안식일 계명의 의미입니다. 병자에게 참된 안식은 병으로부터 치유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병자를 안식일에 치유케 하는 것은 안식일 계명의 참된 완성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안식일에 병고치는 것을 안식일 계명을 범한다하여 금지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일을 하신다’ 라고 하신 것은 ‘너희들 기준으로 보면 안식일에도 하나님이 일을 하시므로 하나님도 안식일을 범하신 것인가’라고 물으시면서 그들의 안식일 인식이 잘못되었음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Q4. 그들은 왜 예수님을 죽이려 했을까요?

그들이 생각하기에 예수님은 안식일을 어기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을 친 아버지로 칭하심으로 하나님과 동등되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병고치는 것은 안식일을 위반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대답하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씀하셔서 그들의 적개심을 더욱 돋우신 것 같습니다. 왜?


Q5.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하시는 예수님의 근거는 무엇입니까? (21)

병자를 치유하는 일은 생명을 주는 일의 연장선상에 있으며 그것이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나타냅니다. 

병자를 치유하고 생명을 주는 예수님의 행위는 예수를 죽이려는 종교지도자들의 행위와 대조를 이룹니다.


Q6. 19 – 23절은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에 대해서 더 자세히 설명합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을 (         ) 자기가 행하시는 것을 (     ) 아들에게 보이시고, 아들은 (        )께서 행하시는 일을 합니다. 아버지께서 (         ) 자들을 살리심같이 아들도 자기가 (       ) 자들을 살리십니다. 아버지는 (       )을 다 아들에게 맡기심으로 모든 사람으로 아들을 (     ) 하게 하려 하십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을 ( 사랑 ) 자기가 행하시는 것을 ( ) 아들에게 보이시고, 아들은  ( 아버지 )께서 행하시는 일을 합니다. 아버지께서 ( 죽은 ) 자들을 살리심같이 아들도 자기가 ( 원하는 ) 자들을 살리십니다. 아버지는 ( 심판 )을 다 아들에게 맡기심으로 모든 사람으로 아들을 ( 공경 ) 하게 하려 하십니다.

"그보다 더 큰일” 예수를 살리시고, 나사로를 살리신 그 일은 병자를 치료하는 것보다 더 큰 일입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하나님의 맡기신 일을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있어 완벽한 하나님의 대표자이고, 우리를 위해서는 하나님 앞에 서있는 대제사장님이십니다. 하나님의 모든 축복과 선한 선물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또한 예수님을 높이는 것이 하나님을 높이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대적하는 종교지도자들은 결국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라고 분명한 경고를 하신 것입니다.



종교 지도자들이 율법의 정신인 사랑과 생명이 아닌 율법 자체에 집중하다 보니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예수께서 생명의 창조자이자 근원이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명하는 것은 바로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그는 우리에게 오셔서 은혜와 생명의 영원한 근원이 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가 아버지로부터 왔다는 것을 확신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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